≣ 목 차
해녀의 기원
제주 해녀만큼 굴곡진 삶을 이어온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보통 해녀라고 하면 제주도를 많이 떠올리지만, 남해 연안의 섬이나 수심이 깊은 동해 연안의 어촌에도 제주도 못지않게 해녀가 많이 있습니다. 다만 겨울에도 어느 정도 따듯한 수온을 유지하는 제주도와는 달리, 동해는 가을이 지나 겨울이 되면 수온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때문에 조업의 어려움이 훨씬 더합니다. 다만 제주 이외 다른 지역의 해녀도 대부분 제주 출신이 예전에 이주한 케이스가 많이 있습니다. 부산 영도(동삼중리 해녀촌)에 가보면 제주도 사투리를 사용하는 해녀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해녀하면 주로 여성이지만, 현대에도 남자 잠수부가 없지는 않습니다. 잠수복을 입고 수면 위에서 공기를 공급받으며 바다를 누비는 남자 잠수부는 머구리라고 부르는데, 해녀와 같이 물질하는 남자 잠수부가 없어서 아예 잠수부 전체를 아울러 부르는 것입니다.
현재는 해녀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제주도에선 '잠녀'나 제주도 방언인 '좀녀(ᄌᆞᆷ녀) 또는 좀녜(ᄌᆞᆷ녜) '라고 불렀으나 지금은 둘 다 쓰고 있습니다. 잠(潛) 자의 제주식 발음이 아래아가 들어가 "ᄌᆞᆷ"입니다. '해녀'라는 말은 일제 강점기에 등장해 1980년대 이후 다수를 차지하게 됐지만 제주 어촌에서는 잘 쓰지 않고 있으며 채취작업 하러 나가는 것은 물질하러 간다고 표현합니다.
해녀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문헌상으로는 고려시대인 1105년(숙종) 탐라군(제주도)에 구당사(勾當使)로 부임한 윤응균이 “해녀들의“ 나체조업을 금한다”는 금지령을 내린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해녀와 비슷하게 작업하는 남자 잠수부는 포작인(鮑作人), 포작간(鮑作干), 포작한(鮑作漢), 복작간(鰒作干) 등으로 불렀습니다. 포작(鮑作)이라는 업에 종사하며 진상역을 담당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원래는 '보자기'(혹은 보재기)라고 부르는 것을 한자음을 빌려 포작이라고 쓰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어부면서 동시에 잠수사 역할을 하였으므로 신량역천(身良役賤)입니다. 포작인은 깊은 수심에서 전복, 소라, 고동 등을 전문적으로 채집하고, 해녀는 비교적 얕은 수심에서 해조류를 중심으로 채집하여 역할이 비교적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어부이자 잠수부 역할을 수행하면서 외적을 방비하는 수군 및 노를 젓는 격군의 역할을 겸하는 포작인은 일이 힘들었고, 공물로 바쳐야 할 전복 등의 할당량은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다 보니 결국 견디지 못하고 죽거나 도주해 버리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조선 정부에서는 문제를 해결할 생각은 안 하고 조천(朝天)과 별도(別刀)의 두 포구만 개방하고 나머지는 폐쇄해 버렸는데, 이는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도주를 꾀하는 역효과만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조선 숙종 때에는 아예 출륙금지령을 내리고 어선 건조마저 금지시키는 등 더욱 적극적으로 제주도에 묶어두려 애를 썼습니다. 진상해야 할 공물은 많은데 남은 인원으로는 할당량이 도저히 감당이 안되자 이번엔 포작의 역을 아예 숫자가 많은 해녀에게 전부 떠넘겨 버렸습니다. 해녀 입장에선 날벼락 맞은 셈이나 다름없었고 결과적으로 포작간이라는 직업은 아예 없어져 잠수부는 해녀만 남게 되었습니다.
감압병, 이명 등의 직업병을 달고 살아야 되는 어렵고 위험한 직업이라, 정조가 해녀들 이야기를 듣고 그 좋아하던 전복을 끊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물부담은 오히려 늘어 민란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그 결정판이 바로 신축민란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해녀들은 크게 시달렸는데, 일본은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해조류 및 해산물들을 전쟁용품으로 조달하면서 제주 해녀 수가 많이 증가하였으며 제국주의 수탈의 가장 하위 노동자로 노동을 착취당하여 궁극에는 항일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하였습니다.
해방 후에는 군사적인 부분에서 활약하기도 합니다. 독도 의용수비대와 독도 경비대의 경비 활동에 필요한 물품 운반, 식수 보급, 식량 조달 등을 도왔으며, 독도 시설물 건립에도 참여하였습니다.
해녀의 복장
지금이야 잠수복을 입고 오리발을 신고 물질을 하지만 옛날에는 알몸인 상태로 바닷속으로 들어갔으며, 1105년(고려 숙종 10) 탐라군(耽羅郡) 구당사(勾當使)로 부임한 윤응균이"해녀들의" 나체(裸體) 조업을 금한다"는 금지령을 내린 기록이 있으며, 일본에서는 개화 이후인 비교적 최근까지 대부분 달랑 팬티 하나만 걸치거나 전라(全裸)의 상태로 물질을 했습니다.
실제로도 방수가 되는 잠수복이 아닌 이상 옷을 걸치고 바다에서 활동하는 건 굉장히 비효율적입니다. 육지에서의 옷의 기능인 체온유지를 전혀 할 수 없는 데다, 너풀거리고 몸에 달라붙어 물속에서의 움직임도 제한됩니다. 거기에 대부분의 섬유들은 물보다 비중이 높아, 물에 젖으면 무거워 떠오르기도 힘듭니다. 그리고 물에 젖은 옷을 입고 육지에서 활동하면 옷이 무거워 쉽게 피로해지고 물이 증발하면서 체온도 빼앗겨 감기에 걸리거나 저체온증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바닷물이 마르면 소금이 맺히기 때문에 빨래를 한번 더 해야 하는 단점까지 있으니 바다에서 활동하기에는 맨몸이 훨씬 효율적입니다.
고무옷이 나오기 전까지 착용했던 전통 해녀복인, 물옷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702년에 그려진 탐라순력도에 물소중이를 입고 물질하는 해녀의 모습이 보이며, 이로 보아 최소 18세기 초부터 물옷을 입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물옷은 크게 물소중이와 물적삼으로 나뉩니다. 탐라순력도에 그려진 해녀복을 고안하게 한 사람이 당시의 제주목사 이형상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물소중이는 상반신까지 가릴 수 있도록 원피스 형태로 되어있는 반바지로서, 제주도 여성들의 전통적인 속옷으로도 널리 쓰였습니다. 본래 상반신을 가리지 않는 형태였다가 차차 길어져 상체까지 가리게 변화된 것으로 추정되며, 한 개 혹은 두 개의 어깨끈으로 흘러내리지 않게 고정시켜 줍니다.
물적삼은 물소중이 와 함께 착용하는 상의로서, 보온이나 햇볕을 막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앞섶을 매듭단추로 여미는 형태이며, 소맷부리와 도련에는 끈이나 고무줄을 달아 조일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이외에도 머리에 두르는 물수건(두건)이나 머리와 목덜미 전체를 덮는 모자인 까부리 등이 있습니다.
잠수복은 매우 유사한 디자인과 형태를 지니고 있고, 그 용도도 대동소이하며, 재질은 안감은 흔히 잠수복에 쓰이는 네오프린 소재이며, 겉 부분에는 고무를 댄 것입니다. 본래 1970년대 일본에서 사용하던 것이 그대로 한국으로 건너와 퍼진 것으로, 최초 보급 당시 만만찮은 가격이었기에 각 마을마다 고무옷을 사용하는 해녀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지만, 보온성이나, 내수압 능력등 여러모로 물옷을 입고 물질하는 것에 비해 작업능률이 매우 높아져서 순식간에 보급되었습니다. 이는 해녀들의 안정적인 생계유지에 도움이 되는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물론, 보급 초기에는 해녀복의 비싼 가격과, 이상한 생김새에 대한 반감. 해녀복을 입은 해녀와 그렇지 않은 해녀들의 작업능률의 격차로 인한 반발도 있었고, 보급이 널리 이루어진 뒤에도 피부질환이나, 장시간 잠수로 인한 두통, 이명, 요통 등 해녀들의 직업병이 부각되는 단점을 가지고 왔고, 이는 현대에 들어서도 변함없이 발생하고 지적되는 문제점 들입니다. 실제로 해녀들은 진통제 등을 달고 사는 경우가 많았으며, 물옷에 비해 입고 벗기도 불편해서 착용하거나 벗을 때 서로 도와주어야 하는 불편함도 있었습니다.
해녀의 등급
잠수복만 입으면 모두가 똑같아 보이는 해녀들 사이에도 엄연히 계급이 존재합니다. 상군, 중군, 하군입니다. 한번 잠수해 22분가량 바닷속에 머무르는 상군은 수심 15m 이상의 바다에서 작업하는 베테랑 해녀이고, 중군은 수심 8~10m, 하군은 5~7m에서 작업합니다. 참고로 지역마다 등급이 조금씩 달라서 최하급인 '똥군', 최상급인 '대상군'도 있다고 합니다. '똥군'은 보통 이제 막 물질을 배우기 시작한 사람에게 쓰는 말이라고 합니다.
낭만적인 인상이 있지만 사실 해녀의 직업 특성상 잠수하는 시간이 최대 7시간 정도로 꽤 길기 때문에 감압병, 이명, 저체온증 등 상당히 위험한 극한직업입니다. 전직 해녀의 증언에 의하면 물질을 하다 보면 바닥에서 수면으로 올라오면서 정신이 아득할 때가 종종 있다고 합니다. 이때 정신줄을 놓으면 바로 죽습니다. 그래서 해녀들이 내쉬는 숨비소리를 '생과 사의 경계'라고 표현하거나 '생애 최후의 날숨'이라 하는 경우도 있으며, 해녀들이 부르는 민요에서 조차 '저승길 왔다 갔다'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워낙 힘든 직업이다 보니 딸이 태어나면 해녀짓을 시킬 수 없으니 차라리 죽도록 엎어버린다는 민요마저 있을 정도입니다.
제주의 불턱
제주도 해안가를 거닐다 보면, 네모 혹은 원형모양으로 돌담을 쌓아놓을 곳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불턱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불턱은 해녀들이 자신들이 짊어지고 온 구덕(바구니)을 두고 옷을 갈아입고 바다로 가기 전 준비를 하기도 하며, 물질을 하다가 바다 밖으로 나와서 불을 피우며 쉬거나 마무리 작업을 하고, 옷을 갈아입는 쉼터 같은 곳입니다.
보통 제주의 칼바람을 막고 노출을 피하기 위해 돌담을 쌓아 만들고, 가운데에 모닥불처럼 불을 피워 몸을 말리고 따뜻하게 합니다. 또한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인 소위 ‘물건’들을 손질하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물질할 때 주의사항 등 규칙을 공유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불턱에서 불을 쬐면서 몸을 녹이는 해녀들이 간간이 보였는데 이제는 그러한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현대식 해녀 탈의실이 생기기 이전 해녀들은 물질을 가기 위해 불턱으로 하나, 둘씩 모여드는데 물질을 나가는 해녀의 질구덕에는 ‘테왁’과 ‘비창’ 등 물질에 쓰이는 도구와 함께 불을 지필 땔감이 들어 있습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되다
2013년 12월 문화재청에서는 제주 해녀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추진을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2007년부터 제주도에서 홀로 추진해 오던 것이었는데, 일본에서 '아마(일본 해녀)'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자 정부 차원에서 진행이 가속화된 것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2016년 11월 30일 자로 제주 해녀의 등재가 확정되었습니다.